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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호(6-7월) | 한국전쟁 초기의 기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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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조덕현(충남대학교 교수) 작성일18-06-25 11:02 조회1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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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초기의 기뢰전

 

 

 

                                조덕현

충남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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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해전사(history of naval warfare)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긴밀히 진행되었다. 물론,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을 통해 입증되었듯이, 어느 한 해전이 전체 전쟁의 성패를 좌우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정학적 위치에 따라서는 해전과 해군의 중요성은 그 국가의 전쟁 수행 과정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국전쟁 연구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겪은 한국전쟁을 육군 위주의 전투로 이해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그렇다고 3년간의 한국전쟁 가운데 대부분의 전투가 육지에서 이루어졌음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 한국전쟁 기간 동안 UN군과 한국군이 한반도 해역에 대한 해상통제권(command of the sea)을 장악하지 못했다면 어떠했을까? 두말할 나위도 없이 전쟁 자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상과 하늘에서의 작전은 병력과 보급품의 지속적인 흐름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고, 군수물자의 대부분은 태평양을 건너 수송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으로 이송된 병사들 중 90%가 바다를 통해 들어왔으며, 화물 5,400만 톤과 유류 2,200만 톤도 해상으로 운송되었다. 또한, 항공기가 군수물자 1톤을 운반할 때 해상으로는 270톤이 운송되었다.  

  해전은 크게 나눠 수상전과 잠수함전, 그리고 해군항공전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 중 수상전은 주로 전함이나 순양함과 같은 주력함을 이용한 함포전과 항모탑재 항공기로 교전한다. 이런 수단은 모두 공격적인 전술의 성격을 지닌다. 지난 전쟁의 역사를 통해 볼 때, 공격전술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가 하나 있었다. 그것이 바로 방어전술이다. 해군전술에서 대표적인 방어전술로는 기뢰전을 들 수 있다. 기뢰는 그 특성상 어뢰나 미사일처럼 적함에 자율적으로 접근 혹은 접촉해서 손상을 주는 무기는 아니다. 오히려 기뢰는 특정 장소에 기다리다가 적함이 그곳으로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지연시킬 수 있는 무기다. 그런 점에서 기뢰의 전략적 가치는 막대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전쟁 초창기에 있었던 기뢰전에 대한 고찰을 통해 당시 해전뿐만 아니라 현대해전에서 기뢰전이 갖는 의미와 그 교훈을 도출하고자 한다.  

 

 

Ⅱ. 기뢰전의 역사

   기뢰전의 핵심은 적군의 해상교통로(sea lines of communication : SLOC), 잠수함 작전구역, 그리고 항구들을 파괴하거나 자기의 것으로 확보하여 해상통제권을 장악하는 데 있다. 공격적인 측면에서의 기뢰전은 적군의 함선들을 공격하거나 자국의 바다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인데 반해, 방어적인 측면에서의 기뢰전은 자신의 바다를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저지하는 것이다. 해전 역사상 기뢰는 특정 해역을 함선이 통항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유일하게 지리적인 여건을 임의로 변경시킬 수 있는 무기이다. 따라서 기뢰로 인해 위험지역으로 지정된 해역은 세심한 주의가 요구되며, 마치 그곳이 지뢰가 부설된 육지처럼 장애물로 간주되어 될 수 있는 한 피하려고 한다.

  역사상 기뢰는 무려 350여 년 동안이나 해전에 사용되었다. 18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해상용 기뢰를 “어뢰”라고 명명했다. 모바일 만에서 데이비드 글레스고 페러굿(David Glasgow Farragut) 소장이 했던 유명한 명령(“어뢰 따윈 아무 것도 아냐. 전속력으로 전진하라.”)에서의 어뢰는 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부 연합군이 사용하던 바다 기뢰였다. 기뢰원을 통과한 후 극적으로 모바일 만에 진입했던 페러굿 제독의 사례는 해군역사상 오랫동안 전설로 남았고, 해군 장교들에게도 중요한 교훈이 되었다. 이 사건은 기뢰에 대한 해군의 시각을 바꾸어 놓았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태평양에서 2회에 걸쳐 중요한 기뢰전을 수행하였다. 이 두 개의 작전 중 처음으로 수행하였던 작전은 남태평양과 동태평양에서 펼쳐졌다. 이 작전은 ‘기아작전(Operation Starvation)’이라고 명명되었다. 일본 본토 주위의 섬에서는 이를 유심히 관찰하였다. 전쟁 종료 5개월 동안 1,250,000톤이 넘는 일본군의 물자가 파괴되었고, 시모노세키 해협과 일본 연안은 기뢰에 의해 공격 받았다. 자기기뢰(magnetic mine)를 처음으로 개발한 국가는 영국이었다. 그러나 실제 전투에 사용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었다. 접촉기뢰(contact mine)와는 달리, 자기기뢰는 앵커를 이용하여 따로 부설할 필요 없이 그냥 바다에 뿌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당시 미 해군 태평양기뢰함대에 배속된 함정은 500척이 넘었고, 여기에는 3,000여 명의 장교들과 30,000여 명의장병들이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미 해군에는 구축함형 소해함(destroyer minesweeper) 2개 전대, 소해함 2개 전대, 그리고 소형 소해함 21척이 전부였다. 한국 주둔 미 해군은 적군을 공중 또는 잠수함 공격으로 저지시킬 계획이었다. 적군의 연안 육상부대를 지원하는 함정을 침몰시키는 것, 정확한 곳에 폭발물을 투하해서 해안 방어선을 무너뜨리는 것, 적 해안을 봉쇄하는 것 등이 주된 목표였다. 다시 말해 접촉기뢰와 자기기뢰 소해를 제외한 모든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그들은 소해함 몇 척을 제외한 모든 종류의 함정들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전쟁 기간 중 북한이 기뢰를 사용했다는 증거는 많다. 이는 남북한 해안선에 부설된 기뢰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원산상륙작전을 개시하기 이전에 10일 동안 부설된 기뢰를 제거하는 것이 목표였다. 미국은 소해작전 기간 10일 중 초기 3일 동안에 대형 소해함 2척을 잃었다. 이로 인해 사기가 꺾인 미국 해군은 다음과 같은 전보를 펜타곤으로 보냈다. “미국 해군은 한반도 해상에서의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소해 임무를 완전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7일이라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러나 이미 한국군이 육상에서 많이 진출했기 때문에 소해가 완전히 끝나고 난 후 상륙해야한다고 함장은 결정했다. 부설된 300여 개의 기뢰 중 225개만 제거되었다.

 

 

Ⅲ. 태평양에서의 소해작전 1946-1950

 

   1946년 3월이 되자 태평양함대의 기뢰전대사령부는 일본에서 철수하여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트레저 아일랜드로 이전하였다. 곧 이어 해군참모총장이 전쟁이 끝나자 소해함의 임무 수행 장소를 지정했다. 모든 기뢰부설함은 대서양함대의 기뢰전대에 이관된 4척을 제외하고 예비역으로 지정되었고, 모든 기뢰탐색함은 대서양 기뢰전대에 배속된 3척을 제외하고 폐선하였다. 그러나 아직 소해함 기함의 기뢰부대가 일부 잔존한 상태였으며, 구축함형 소해함(DMS) 2개 분대, AM급 소해함 2개 분대, AMS급 소해함 21척, 그리고 처음으로 개발한 소해정(MSB) 2척이 있었다.

  1947년 1월은 기뢰전 준비상태에 있는 미 해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준 달이었다. 그로 인해 해군참모총장 니미츠 제독은 1948년 함대에 할당된 예산 감축으로 인해 태평양상의 기뢰전대사령부를 해산시키고 태평양과 대서양의 기뢰전대를 감축하였다. 태평양함대에 남아있던 소해정들은 모두 해체되거나 분리되었다. 태평양함대 내 기뢰전대 소속 두 명의 장교만 계속해서 기뢰전 계획을 맡았다. 전비계획 장교는 근무지원사령관에게 기뢰와 소해 부대를 남겨둘 것을 요청했고, 태평양함대사령관에게는 지금까지의 여러 정책과 계획안을 현행 유지하도록 보고했다. 

  1948년 이후부터 더 이상의 부대 해체는 없었으나 훈련은 지지부진했다. 제대로 지휘할 수 있는 장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때문에 적임자를 유지시킬 방법도, 규정된 훈련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구축함이 부족해서 구축함형 소해함은 대잠전나 군함들을 호위하는 등 예전에 비해 비교적 중요성이 떨어지는 임무만 맡았다. 일본에 주둔해 있던 AMS 6척을 제외한 나머지는 샌디에고, 진주만, 그리고 괌 사이에 기뢰를 소해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부대의 분배로 인해 제대로 된 소해훈련을 할 수 없었다. 이 시기동안 여분의 장교 숙소는 함대 대원들에게 할당되었고, 태평양함대 사령관은 다시 참모들에게 기뢰전에 대한 새로운 임무를 부여했다.

  1949년과 1950년 6월 사이에 남아있는 병력은 그대로 있었다. 근무지원사령부는 계속해서 좀 더 발전된 기지에서 새로이 개발한 기뢰를 시험하고 있었고 진주만과 본토 사이에서 계속하여 소해 훈련을 실시하였다. 더 나아가 그들은 태평양함대 지침서를 제작하여 각 지역에 배치되어 있는 기뢰부대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주었다. 

  이와 같은 기뢰전을 지휘할 수 있는 지휘관은 태평양함대에는 없었다. 여전히 소해함 유형은 태평양함대 근무지원사령부(AM, AMS)와 태평양함대 순양함․구축함사령부(DMS)로 나누어져 있었다. 5월에 태평양함대사령부는 D-Day때 이와 같은 부대를 출동시키라고 명령했지만 본래의 예산안에 비하면 너무나도 비싼데다가 그 만한 인원들을 데리고 올만큼의 가치가 없다고 느꼈다. 이 추천안을 해군참모총장이 승인하였다.

  1950년 6월에 또 다른 형태의 전쟁이 한국에서 발발하자 북한군은 해안선의 방어, 상륙작전 저지, 그리고 UN군의 물자공급을 차단시키기 위해 기뢰를 사용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UN군은 해군항공기를 이용하여 기뢰를 찾아내거나 기뢰를 통해 대항하는 방법도 사용했다. 기뢰를 부설하는 데는 수송기를 사용했고, 정찰은 헬리콥터를 사용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러시아가 현대의 그 어떠한 무기보다 오랫동안 관심을 가졌던 무기가 바로 기뢰였으며 실제로 가장 많은 성공을 거뒀다. 러시아는 크림전쟁(Cremean War), 더 나아가 1877-78년에 일어난 러시아-터키 전쟁, 1904-05년에 일어난 러일전쟁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기뢰를 사용하였다. 러일전쟁의 경우에는 러시아 해군이 50년 뒤 원산에서 사용했던 동일한 종류의 접촉기뢰를 통해 만주 남부 해역에 정박해 있던 일본해군 전함 두 척을 침몰시켰다.

  러시아의 기뢰전은 북한 항구에서 UN 해군이 제대로 공격할 수 없도록 수행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한반도는 러시아가 서태평양에서 자국의 기뢰를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이와 동시에 러시아로서는 위성국가인 북한을 지원하여 UN군의 육상부대를 저지시킬 수 있었다. 실제적으로 한반도는 방어용 기뢰를 시험할 수 있는 적합한 지리적인 요건을 지녔다. UN군이 전쟁에 참전한 이후, 북한은 UN군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육군의 장점들을 최대한 살려 북으로 진격하는데 많은 힘을 쏟을 것이라 믿었다. 포항과 인천상륙작전은 이와 같은 특별한 기술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공산국가들은 한반도의 동부지역이 UN군이 비교적 쉽게 상륙작전을 펼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 지형은 바다의 수심이 깊고 들어올 수 있는 통로가 좁았다. 이 해안가는 비교적 일직선이었으며, 수심 약 180미터의 해저지형이 해안선 가까이에 있었다. 원산과 흥남을 조금 벗어난 곳은 수심이 얕아 기뢰를 부설하는데 매우 좋은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7월 10일 이전에 이미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서 북한으로 기뢰가 운송되고 있었다. 그 후 1주일 뒤, 러시아의 기뢰전문가가 원산과 진남포에 도착하여 북한군들에게 기뢰 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반응은 이미 조이 제독이 예측하고 있었고, 미 해군의 기뢰를 7함대와 극동함대(NAVFE)에 전달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약 4,000여 개의 기뢰가 원산으로 운반되었고 8월 1일이 되자 진남포 근처의 해안가에 이미 기뢰를 부설하는 작업은 시작되고 있었다. 이때 러시아 장교들은 인천까지 이동하여 진남포에서 해주까지 물자를 이동시켰고 한강 철교가 끊어지기 전에 미리 기차를 통해 군수물자를 인천, 군산, 그리고 목포로 운송시켰다.

  이에 비해 해상통제권을 장악하려는 UN군의 움직임은 적들의 눈에 띄지 않은 가운데 계속되었다. 8월 중순에 UN군 정찰기들은 원산과 진남포에서 군함의 움직임이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그때 당시의 여러 기술이나 정황은 이들이 기뢰를 부설 중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극동함대사령부(COMNAVFE)의 임무, 7함대, 그리고 공격부대 사령관(Commander Attack Force)은 인천에서 적군이 기뢰를 부설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고 보고하였고, 실제로 이 해역에는 기뢰원이 없다고 보고했다.

  현재로서 가장 신뢰할 만한 자료에 의하면 북한군은 1950년 8월 15일부터 기뢰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 작전에는 강뿐만 아니라 바다에 기뢰를 부설하는 일이 포함되었고, 동해와 서해에 방어용 기뢰 또한 부설하는 일이 포함되었다. 총 2,000여 개의 기뢰가 부설되었다. 이 기뢰들은 러시아의 26형 계류기뢰였고, 수심 456 피트까지 내려갈 수 있는 기뢰였다. 이들은 미국해군의 기뢰와 비슷했으나 미국산 기뢰에 비해 훨씬 파괴력이 강했다. 미국 해군이 기뢰를 부설하는 방식과는 달리 러시아는 통상 기뢰를 부설하지 않은 곳, 예를 들면 강이나 해안가와 같은 곳에 기뢰를 부설했다. 북한군이 부설한 기뢰는 9월 4일 서해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기뢰가 발견되자 소해부대가 소해임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로 UN군은 9월 4일 이전에는 적의 기뢰를 발견하지 못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사건들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 8월 13일에는 진남포에서 적의 공중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VP-6의 전투기들이 적의

       군수물자와 군함들을 공격했다.

  ● 8월 14일에는 원산에서 위장한 군함들과 초계정을 공격해 적의 공중공격에 대응했다.

  ● 8월 16일, 진남포 근해에서 VP-6 전투기가 적의 초계정을 저지하여 격추시겼다.

  ● 10월 14일, 영국해군 세서스(HMS Theseus) 함의 전투기가 진해 남포 근해에서 적의

       기뢰 부설함을 발견하였다.

 

  1950년 11월까지 UN군의 군함 10척이 한반도에서 적의 기뢰에 의해 침몰되거나 손상을 입었다. 여기서 10척이라는 숫자와는 대조적으로 5척의 UN 군함만이 적의 포격이나 폭탄에 의해 침몰 혹은 손상되었다. 이 함정들은 모두 구축함 급이거나 소형 함정이었다. 처음으로 적의 기뢰를 발견한 것은 1950년 9월 4일 진남포 인근 해안이었다. 정보에 의하면 UN 군함이 발견한 적의 주요한 기뢰는 9월부터 부설되었다는 것이다. 약 4,000여 개의 기뢰가 원산을 통해 운송되었다. 발견된 기뢰들은 러시아의 지휘 하에 부설되었다. 그러나 한반도의 북서지역에 부설된 기뢰는 북한이 단독으로 부설했고, 이들 중 대부분은 계류기뢰와 자기기뢰였으며, 음향기뢰는 발견되지 않았다. 

  북한군의 기뢰들은 매우 효과적으로 부설되어 있었다. 그 중 얕은 수심에 부설된 기뢰들은 이 지역으로의 침투를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 최저비용으로 최대효과를 거둔 사례였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북한은 1950년 9월 15일에 인천상륙작전에 영향을 미칠 만큼 많은 기뢰를 부설하지는 못했다. 그 후 북한에 부설된 기뢰는 미8군의 진남포 진입을 방해할 정도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기뢰는 또한 원산상륙작전을 10일간이나 지연시켰고, 흥남과 청진항을 소해하게 함으로써 UN군으로 하여금 이 해역을 사용하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게 만들었다. 더 나아가 북한의 기뢰위협은 UN군으로 하여금 동해에서는 수심 180 미터 밖에서, 서해에서는 기뢰가 부설된 수심 밖에서 함포지원 사격을 하도록 강요했다.

 

 

Ⅳ.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뢰의 특성은 적과 아군 모두가 전술적으로 이용이 가능한 무기인 동시에 서로 서로 역이용도 가능한 무기라는 점이다. 기뢰의 이런 특성과 더불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점은 기뢰전의 역사적 교훈이다. 처음 기뢰를 개발한 것은 영국이지만 이를 완성 후 실전에 적극 활용한 것은 바로 적국인 독일이었다는 점이다. 어느 나라, 어느 군이든 무기를 새로 개발하면 곧장 실험단계를 거쳐 실전에 투입하는 것이 관례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육군과 해군의 경우는 구별된다. 육군은 거의 모든 실험을 육상에서 행한다. 때문에 실험 후 현장 확인이 곧바로 가능하다. 그러나 해군의 경우는 다르다. 주로 바다에서 이루어지는 해군의 사격 실험은 사격 후 곧바로 현장 확인이 어렵다. 거기엔 바다라는 물리적 한계가 있다. 따라서 육군에겐 현장 보존이 수월하지만, 해군에겐 그런 현장 보존이 쉽지 않고, 잠시 있던 현장의 흔적들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역사상 러시아는 크림전쟁에서 기뢰의 효용성을 실험하자마자 곧바로 전쟁에 활용했다. 게다가 러시아는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라는 전장도 십분 이용했다. 이를 통해 자신들이 개발한 기뢰의 성능을 충분히 실험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만 해도 기뢰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했지만, 그 이후부터는 이를 망각했고, 심지어 기뢰전대 자체까지 해체시켰다. 언젠가 미래전에서도 널리 사용될 수 있는 기뢰의 중요성과 기뢰전에 담긴 역사적 교훈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기뢰 하나가 해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기뢰 하나로 함포지원 사격이 방해받고 상륙작전이 지연되는 등 기뢰가 지닌 적극적인 방어의 의미는 깊이 생각해 볼 문제이다. 일본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이후 개최된 얄타회담의 결과에 따라 군비가 크게 축소되었지만, 한국전쟁에 기뢰전 관련 전문인력을 참전시킴으로써 실전 경험을 쌓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한국전쟁 초기 기뢰전이 주는 교훈은 의미 깊다. 비록 방어적인 성격은 강했지만 기뢰전은 평상시 준비가 철저해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 주었다. 그 후 미국은 한국전쟁에서의 교훈을 거울삼아 기뢰전 전문가를 지속적으로 양성해오고 있다. 초임 장교 시절부터 시작해 거의 10년 이상 기뢰전 분야만 전담하면서 교육과 훈련을 반복하는 장교를 양성하고 있는 점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한국해군은 현재 진해 한 곳에 기뢰전대를 두고 있다. 이번 천안함 피격사건을 통해서도 확인되었듯이, 앞으로 전비태세 유지에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기뢰대항 전력을 대폭 증강하여 소해함을 각 함대에 배치함으로써 작전 및 우발 상황에 대비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일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기뢰전대 자체로도 중요한 문제지만 군사력의 생산적인 활용 차원에서도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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