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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8호(12-21.1월) | 러일전쟁 해전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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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조덕현 작성일21-01-07 17:35 조회1,99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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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해전에 관한 연구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조덕현


1. 전쟁의 배경 : Cause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 1904년 8월~1905년 5월은 부동항 획득과 남진정책을 추구하던 러시아와 대륙침략을 도모하던 일본이 한국과 만주의 이권을 둘러싸고 전개한 전쟁이었다. 따라서 이 전쟁은 한국과 만주 그리고 그 주변해역에서 전개되었으며, 미서전쟁과 마찬가지로 러일전쟁에서도 해전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청일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하관조약下關條約, 1895년 4월 17일에 따라 일본은 청으로부터 요동반도大連, 旅順와 대만을 할양받고 한반도에서 청의 세력을 축출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야심에 대해 일부 열강이 의구심을 갖게 되고 이른바 삼국간섭1895년 4월 23일을 제기하였다. 즉, 러시아, 프랑스, 및 독일이 일본에 대해 요동반도의 반환을 권고하였던 것이다.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수행할 자신이 없었던 일본은 부득이 3국의 요구를 수용하고 요동반도를 반환하였다.

  한편, 러시아가 만주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는데, 1898년에 러시아는 청으로부터 여순과 대련을 조차하고 여순 항Port Arthur을 군항으로 개발하였다. 1990년에 의화단사건을 계기로 만주에 출병한 러시아군은 의화단사건이 진압된 후에도 만주에 그대로 주둔하였다. 미국, 영국 및 일본이 러시아에 대하여 만주에서 출군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러시아는 1차 철군만 실시하고 중지하였다.

  1902년 2월 1일에 영국과 일본이 영일동맹을 체결하였다. 이 동맹은 청에 대한 영국의 이권 그리고 조선에 대한 일본의 이익을 보장하겠다는 의도에서 체결되었던 것이다. 영일동맹으로 인해 입장이 크게 강화된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준비하였다. 러시아와 일본은 만주와 한반도 이권을 둘러싸고 협상을 벌였다. 일본의 요구는 러시아에 대하여 만주에서 철군하고 조선에서 일본의 이익을 인정하며, 만주에서 일본의 상업상 진출을 허용하라는 것이었다. 반면에 러시아는 만주에서 일본의 이익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과 조선의 39˚선 이북을 중립지대로 설정하자고 제의하였다. 결국 협상이 결렬되고 1904년 2월 6일 양국은 국교를 단절하였다.

  일본은 1904년 2월 10일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하였는데, 이에 앞서 일본 해군이 2월 8~9일에 인천항의 러시아 함정과 여순 항의 러시아 함대에 대하여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지상전은 주로 남만주에서 진행되었고, 해전은 한반도의 동‧서‧남해에서 전개되었다. 개전 후 여순 항의 러시아 함대에 대한 일본 해군의 공세가 진행되는 동안, 제해권을 바탕으로 일본 육군이 조선과 만주에 상륙하였다. 3월 중순에 진남포에 상륙한 일본 제1군이 4월에 조선 점령을 완료하고 5월 초에 만주로 진격하였으며, 5월 초에 일본 제2군이 요동반도에 무혈 상륙한 다음 러시아군을 공격하기 위해 북진하였다. 1904년 7월 31일부터 일본 제3군이 여순 항을 탈취하기 위한 공격을 개시하여 결전 끝에 1905년 1월 2일 이를 함락시켰다.

  일본 육군은 요양전투遼陽戰鬪, 1904년 8월 30일~9월 4일, 사하전투沙河戰鬪, 1904년 10월 10~16일 및 봉천전투奉天戰鬪, 1905년 3월 10일에서 격전 끝에 러시아군을 격퇴하고 승리를 거두었지만 출혈도 많았다. 반면에 러시아군은 봉천전투 이후에도 만주에 대 병력을 집결시켜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마해전大馬海戰, 1905년 5월 26~27일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패전한 후에 러시아는 미국의 중재를 받아들였고, 9월 5일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2. 양국의 참가세력 및 작전계획


  전쟁에 앞서 러시아와 일본은 군함 구입을 둘러싸고 경쟁을 벌였는데, 이 경에서 일본이 일방적으로 승리하였다. 이탈리아에서 건조 중이던 아르헨티나의 7,800톤급 장갑순양함 2척을 일본이 재빨리 구입하였다. 닛신日進과 카스가春日로 명명된 이들 장갑순양함 2척이 일본으로 회항하려고 하자 러시아에서는 전함 오슬리비아Osliabya를 보내 이들을 격파하려고 시도하였다. 닛신과 카스가는 유럽 해역에서 영국의 전함 킹 알프레드King Alfred의 호송을 받고 영국과 이탈리아 승조원이 조함하여 일본에 회항하였다. 그리고 영국에서 건조 중이던 칠레의 12,000톤급 전함 2척을 러시아에서 구입하려고 하자, 러시아의 구입을 방해하기 위해 영국이 먼저 이들을 매입한 다음 일본에 매각하였다.

  양국의 전력을 살펴보면, 육군 전력에 있어서 일본이 12개 사단 그리고 러시아가 70개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해군 전력에 있어서는 일본이 전함 6척을 비롯하여 총 152척 총톤수 26만 톤이었으며, 러시아는 태평양함대에 전함 7척을 비롯하여 19만 1천 톤을 보유하고 있었다. <표 V-1 참조> 양측의 전력을 비교해 볼 때, 개전 초에는 일본이 유리하였지만 장기전에 돌입하면 러시아가 유리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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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해군은 1903년 12월에 상비함대로서 제1, 제2 및 제3함대를 편성하고 제1 및 제2함대로 연합함대를 조직하였다. 연합함대 사령관에는 제1함대 사령관인 도고 대장이 임명되었으며, 1904년 3월에 제3함대도 연합함대에 편입되었다. 제1함대의 주력인 제1전대 전함 6척과 제2함대의 주력인 제2전대 장갑순양함 6척이 일본 해군의 66함대를 형성하였다. 이탈리아에서 건조된 장갑순양함 닛신과 카스가 2척은 개전 후인 1904년 2월 16일 일본에 도착한 다음 4월에 연합함대에 편입되었는데, 이들은 5월 15일 기뢰에 의하여 전함 2척이 침몰하자 적시에 그 공백을 훌륭하게 메꾸었다.

  러시아 해군은 3개 함대 즉, 발틱함대Baltic Fleet, 흑해함대Black Sea Fleet  및 태평양함대Pacific Fleet로 분할되어 있었다. 러시아 태평양함대는 일본 해군에 비하여 다소 열세했지만, 주력함에 있어서는 거의 대등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러시아는 발틱함대에 전함 11척, 장갑순양함 12척을 포함하여 총 28만 톤의 함정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태평양함대를 증강할 수도 있었다. 러시아는 전함 1척, 장갑순양함 1척, 순양함 1척과 구축함 6척을 극동해역에 증파하기로 결정하였으나, 개전으로 인해 출항이 연기되었다. 개전 시에 러시아 태평양함대는 여순전함 7척, 블라디보스톡장갑순양함 4척과 인천순양함 1척과 포함 1척에 분산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분산이 결국 러시아 해군의 전략적 과오가 되었다.

  일본군의 작전계획은 제1기 작전에서 압록강 이남에서 작전하며, 제2기 작전에서 만주로 작전구역을 확대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본군의 작전계획에 따라 일본 해군의 전략은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도착하기 전에 러시아 태평양함대를 격파하여 제해권을 확보하고 육군부대의 원활한 상륙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러시아군의 작전계획은 일본군을 견제하고 시간을 벌면서 유럽과 러시아에서 증원군이 도착하면 결전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주에서 결전하기 위한 러시아 육군의 병력증강은 단선인 시베리아 철도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에 신속하지 못했으며 단계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러시아 태평양함대의 전략은 일본 육군의 상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발틱함대가 도착한 후에 일본 해군을 격파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입장에서 전투 지역인 한반도와 만주에 병력을 수송하려면 제해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그러나 1903년 10월에 여순 항 해군참모장인 비트게프트Vigelm K. Vitgeft는 “러시아 함대가 파괴되지 않는 한 일본군이 요동반도나 조선 해역에 상륙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한 적이 있었다.



3. 해전의 경과


가. 여순 항 봉쇄전


  1904년 2월 4일, 일본의 어전회의에서 대 러시아 전쟁이 결정됨에 따라 일본 연합함대는 2월 6일 오전에 사세보에서 출항하였다. 이 가운데 인천작전인천항에 있던 러시아 함정의 처리와 육군의 인천상륙을 명령받은 제4전대장갑순양함 1척, 순양함 5척 및 2개 어뢰정대는 육군 수송선 3척을 호송하고 2월 8일 오후에 인천에 도착한 다음, 러시아 함정 앞에서 육군 병력 2,200명을 상륙시켰다. 이때 인천 항에는 러시아의 순양함 베리아그Variag와 포함 코리츠Korietz가 정박하고 있었는데, 일본 해군의 제4전대 사령관 우리오瓜生外吉는 러시아 함정을 외해에서 격파하기 위하여 이들에게 2월 9일 정오까지 인천에서 퇴거할 것을 요구하였다.

  2월 9일 12:20시에 베리아그가 출항하자 외해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본 순양함들이 발포하였다. 교전하자마자 베리아그가 화제를 일으키며 다시 투묘지로 향했다. 결국 전력의 현저한 열세로 인해 탈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베리아그와 코리츠는 이날 오후에 각각 자침하였다. 일본의 입장에서 러시아 여순함대의 격멸 또는 완전한 봉쇄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열쇠가 되었다. 그런데 러시아는 1898년에 청으로부터 여순 항을 조차한 후 이곳을 러시아 태평양함대의 동계 정박지로 정하고 군항사령부와 정비시설 그리고 외각에 포대와 감시소를 설치하여 요새화하였다.

  2월 8일 저녁 여순 항 외해에 도착한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은 예하의 3개 구축함 전대10척를 이용하여 여순 항을 야습하였다. 당시에 러시아의 전함 7척과 순양함 9척이 여순 외항에 정박하고 있었다. 9일 자정을 조금 지나 감행된 일본 구축함전대의 야습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으나, 그 결과는 불만족스럽게 나타났다. 일본 구축함전대는 모두 18발의 어뢰를 발사하였으나 러시아의 전함 차레비치Czarevitch와 레트비찬Retvizan 그리고 순양함 1척이 2개월 정도의 수리를 요하는 손상을 주는데 그쳤다.

  이미 러시아와 일본 양국의 국교가 단절되어 정세가 긴박한 상황에서 이날 러시아 군의 경계 태세는 불충분했다. 여순함대의 주요 간부들은 함대사령관 스타크Oskar Stark 중장의 부인이 주최하는 무도회에 초청을 받았고 장병들은 상륙한 상태였다. 외해에 러시아 구축함 2척이 해상경비를 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발포 금지 지시와 함께 수상한 함정을 발견하면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 이후 러시아 함정 1척이 일본 함정의 접근을 보고하였을 때에는 이미 여순함대가 공격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습이 성공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과가 미흡했던 것은 일본 구축함전대의 전투 능력이 미숙하였기 때문이다.

  여순 항에 대한 기습은 전술적으로 실패했다고 볼 수 있지만, 전략적 성과는 매우 컸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야습으로 인해 여순함대가 당분간 출동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일본 해군이 황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일본 육군의 주력이 조기에 한반도에 상륙하였으며, 또한 러시아 육군보다 먼저 남부 만주에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여순 항 야습에 이어 일본 연합함대의 공격이 계속되었다. 일본 연합함대의 여순 항 공격은 주간 포격, 항구폐색, 기뢰에 의한 봉쇄, 함대봉쇄 그리고 지상군에 의한 배후 공격으로 이어졌다. 지상군에 의한 배후 공격의 목적은 일본 육군이 요동반도에 상륙하여 여순 항을 압박할 경우 지상으로부터 위협을 받게 된 여순함대가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도록 강요하는 것이었으며, 여순함대가 출항하면 해상에서 이를 격멸하겠다는 것이었다. 일본함대로서는 발틱함대가 극동에 도착하기 전에 여순함대를 반드시 격멸해야만 했던 것이다.

  여순 항에 대한 일본 연합함대의 포격은 2월 9일 주간부터 여러 차례 시도되었지만, 여순함대와 해안포대의 반격으로 인해 원거리에서 실시되었기 때문에 큰 성과가 없었다. 그리하여 강구된 것이 항만 입구에 상선을 자침시켜 러시아 함정이 출입하지 못하게 항로를 폐색시키겠다는 폐색작전閉塞作戰이었다. 이러한 폐색작전은 미서전쟁 시 산티아고 봉쇄전에서 미국 해군이 시도한  전술이었다.

  여순 항에 대한 폐색작전은 세 차례제1차 : 1904년 2월 23~24일 폐색선 5척, 제2차 : 3월 25~26일 폐색선 4척, 제3차 : 5월 2~3일 폐색선 12척에 걸쳐 시도되었다. 폐색작전은 러시아군 포대 바로 밑에서 실시해야 하기 때문에 야간에 신중하게 진행되었지만, 이 작전 역시 해안포대의 공격, 악천후, 도중 좌초 또는 자침 위치의 부정확 등으로 인해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다음으로 채택된 공격 방안이 기뢰에 의한 「봉쇄」였다. 일본 해군에 의한 기뢰부설은 4월 12일 야간에 실시되었으며, 기뢰부설의 성과는 그 다음 날 나타났다. 이날 러시아의 여순함대 사령관이 승함한 전함 페트로파브로브스크Petropavlovsk가 기뢰에 접촉되어 순식간에 침몰하고 사령관 마카로프Stepan O. Makarov 제독과 600여 명의 장병이 전사하였다.

  1904년 3월 초에 여순함대 사령관으로 부임한 마카로프 제독은 『해군전술론Discussion of Questions in Naval Tactics』의 저자로서 러시아 해군의 뛰어난 전술가였으며 정열적이고 명망 있는 지휘관이었다. 마카로프는 그동안 침체된 여순함대의 분위기를 일신하고 감투정신을 고취하였다. “훌륭한 포가 승리를 가져오며, 장갑은 단지 패배를 지연시킬 뿐이다.”라며 방어보다 공세를 강조한 그는 여순에 부임한 후 요새포의 사정권 안에서 치고 빠지는hit and away 보다 더 적극적인 작전을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날도 그는 일본 순양함전대를 요격하기 위해 출항하였다가 참변을 당했던 것이다. 어쨌든 마카로프 제독의 전사는 러시아 해군에게 큰 불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기뢰에 의한 피해는 일본 해군에도 나타났다. 5월 15일에 일본의 전함 하츠세와 야시마가 러시아군이 일본함대의 행동을 분석하고 은밀히 부설한 기뢰에 접촉되어 침몰하였다. 이 참사로 인해 일본은 전함 6척 가운데 2척을 상실하는 큰 타격을 받았다. 이제 극동 해역에서 전함의 수는 러시아가 일본에 비해 6:4로 우세하게 되었다.

  그런데 마카로프 제독의 후임자인 비트게프트 소장은 곧 방어태세로 일관하였다. 그는 여순함대가 제1태평양전대로 편성되며 발틱함대가 제2태평양전대로서 7월에 출항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발틱함대가 도착할 때까지 여순함대를 보존할 수 있다면 러시아 함대는 수적으로 일본함대를 압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8월 초에 여순 항이 일본 육군의 포격 사정권에 들어갔기 때문에 여순 항의 함락은 임박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비트게프트는 의심의 여지없이 여순함대를 이끌고 여순을 탈출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든가, 탈출이 실패할 경우에는 일본함대에 최대한 타격을 주어 나중에 도착할 발틱함대가 승리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했다. 한편, 일본 해군의 입장에서는 발틱함대가 극동해역에 도착하기 전에 여순함대를 격멸해해야만 했다. 그것도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격멸해야만 일본함대는 함정의 정비와 훈련을 마치고 발틱함대를 대적할 수 있었다.


나. 황해 해전과 울산근해 해전


  1904년 8월 10일, 산동반도 북방해역에서 전개된 황해 해전은 여순 항을 탈출하려는 러시아 여순함대와 이를 차단하려는 일본 연합함대 사이에 일어난 해전이었다. 이어서 8월 14일에 전개된 울산근해 해전은 여순함대의 탈출을 지원하려는 블라디보스톡의 러시아 장갑순양함전대와 이를 차단하려는 일본 장갑순양함전대가 교전한 해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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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트게프트 소장은 8월 7일 니콜라이 2세Nicholas II 황제로부터 “전 함대를 인솔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라!”는 칙명을 받았다. 이에 앞서 6월 23일에 비트게프트 지휘 아래 여순함대가 출항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일본함대에 의해 차단 당해 다시 여순 항에 입항한 적이 있었다. 8월 10일 오전에 비트게프트 지휘 아래 여순함대가 출항하였다. 순양함 1척과 구축함 8척이 먼저 출항하고 뒤이어 전함 6척과 순양함 3척이 출항하였다. 오전에 여순함대가 출항했다는 보고를 받은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제독은 즉시 예하 함대를 집결시켰다. 도고의 주력은 전함 4척과 장갑순양함 2척이었으며, 순양함 8척과 구축함 18척 그리고 어뢰정 30척이 합세하였다.

  정오경에 도고는 북서 방향에서 남진하는 여순함대를 접촉하였다. 연합함대의 주력은 여순함대의 진로를 차단하고 13:00시에 원거리에서 포격을 개시하였다. 도고는 6월 23일의 상황을 기억하고 여순함대가 다시 여순 항에 입항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여순함대를 외해로 유인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도고는 비트게프트의 교묘한 회피기동에 말려들어 4시간 가까이 애매한 함대기동을 하게 되었다. 약 1시간의 교전 끝에 여순함대가 사정권에서 이탈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러시아의 전함 레트비잔의 수면 하 손상 때문에 15:00시경에 이르러 비트게프트는 함대 속력을 14노트에서 12.5노트로 감속하였다.

  속력이 우세한 일본함대는 러시아 함대를 추격하여 16:20시에 7,000미터 거리에서 포격을 재개하였다. 일몰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이때에도 여순함대는 탈출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여순함대로서는 불행하게도 18:12시에 러시아의 기함 차레비치 함교에 포탄 2발이 명중해 사령관과 참모 전원이 전사하였으며, 곧이어 함장과 키 왼편 상태에서 타수마저 전사하여 기함이 좌현으로 크게 회전하면서 자신의 종렬진을 향해 돌진함에 따라 여순함대는 혼란에 빠졌다. 도고는 호기를 잡고 사정거리를 좁혔지만 어둠이 밀려 왔고 러시아 구축함분대가 접근함에 따라 20:00시경에 사격을 중지하고 구축함분대와 어뢰정대에게 야간 공격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일본 구축함과 어뢰정의 야간 공격은 성과 없이 끝났다.

  결국 여순함대는 분산한 채 도주하였는데, 여순 항에 입항한 것은 전함 5척과 순양함 1척 그리고 구축함 3척이었다. 차레비치는 순양함 1척 및 구축함 3척과 함께 무장해제를 당했으며, 순양함 1척과 구축함 1척은 상해에서 그리고 순양함 1척은 사이공에서 무장해제를 당했다. 일본함대는 기함 미카사에 10여 발이 명중되어 5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을 제외하고는 큰 피해가 없었다.

  한편, 블라디보스톡에 기지를 둔 러시아의 장갑순양함 3척은 일본군의 해상교통로를 위협하고 동시에 일본함대를 견제하였다. 블라디보스톡 전대는 전후 7차례에 걸쳐 출동하여 일본의 해상교통로를 공격하였는데, 4월 12~19일에는 대한해협까지 진출하여 일본 수송선 3척을, 7월 하순에는 일본 동해안에 출몰하여 여러 척의 상선을 격침시켰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톡 전대를 격파하도록 임무를 부여받은 카미무라 중장의 제2전대는 러시아 함정을 포착하지 못해  비난을 받았다.

  여순함대의 탈출과 블라디보스톡 전대의 남하에 대비하여 대한해협을 경비하고 있던 카미무라 전대의 장갑순양함 이즈모, 아주마, 토기와 및 이와테 4척은 8월 14일 05:00시에 울산 근해에서 남하하는 블라디보스톡 전대의 장갑순양함 러시아Russia, 그로모보이Gromoboi 및 루릭Rurik 3척을 발견하였다. 05:23시에 카미무라 전대가 거리 8,000미터에서 포격을 개시하였다. 05:52시에 이미 러시아 장갑순양함 3척이 모두 화재를 일으켰으며, 06:30시에 루릭이 타기 고장으로 전열에서 이탈하였다. 러시아의 나머지 2척이 루릭을 구하기 위해 카미무라 전대를 북쪽으로 유인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10:42시에 루릭이 자침하고 나머지 2척은 많은 피해를 입고 블라디보스톡을 향해 도주하였다. 여순 항에 입항한 러시아 함정은 그곳에서 수리하였으나 다시 탈출을 시도하지 않았다. 블라디보드톡 전대 역시 그 후 종전될 때까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이제 한반도 주변해역의 제해권은 완전히 일본 해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한편, 여순 항의 공방전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는데, 이것은 여순 항이 일본 해군에 의해 먼저 함락되느냐, 그렇지 않으면 발틱함대가 극동 해역에 먼저 도착하느냐 하는 시간의 경쟁이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의 여순 항에 대한 공격은 해군과 육군의 합동작전으로 진행되었는데, 일본 육군의 제3군이 155일 동안 여순 항을 배후로부터 공격한 끝에 12월 5일 여순 항을 제압할 수 있는 203고지를 탈취하였다. 일본군은 이곳에서 항내의 러시아 함정에 대하여 포격을 가했으며, 12월 9일이 되자 결국 여순함대는 항내에서 차례로 격침되고 말았다. 1905년 1월 2일 여순 항이 함락되었지만, 일본 육군은 여순 항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쉽게 대체할 수 없는 함정의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결국 59,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대가를 치렀다.



<참고 문헌>


조덕현. 『세계사 속의 해전』. 서울 : 신서원. 2006.

조덕현. 『해전사 속의 해전』. 서울 : 신서원. 2010.

조덕현. 『전쟁사 속의 해전』. 서울 : 신서원. 2016.

Jukes, Geoffrey. The Russo-Japanese War, 1904-1905. Osprey Publishing. 2002. 

Lardas, Mark. Russian Battleships and Cruisers of the Russo-Japanese War. Osprey Publishing. 2019.

Vladimir, Semenoff. The Russo-Japanese War at Sea. Leonaur.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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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제 48호(12-21.1월) Written by 김종서 | 01-07 | 3083 군의 갈등관리와 조직 효과성 향상방안 인기글
군의 갈등관리와 조직 효과성 향상방안 -해군 초급간부와 병사들의 갈등관리를 중심으로- 충남대학교 국가안보융합학부 김종서 교수 Ⅰ 서 론 인간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갈등은 항상 발생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며 인간의 삶은 갈등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갈등은 가치관, 사고방식, 신념 등의 개…
공지 제 47호(10-11월) Written by 이승준 | 11-10 | 2045 영국의 역사가 한국에게 주는 시사점 (군의 역사를 중심으로) 인기글
영국의 역사가 한국에게 주는 시사점 -군의 역사를 중심으로- 충남대학교 국가안보융합학부 겸임교수 이승준 ​ ​ Ⅰ. 서 론 섬나라인 영국은 역사적으로 볼 때 바다를 통해 국가발전을 추구하여 왔다. 그 과정에서 왕실해군(Navy Royal)을 건설하고 이를…
공지 제 47호(10-11월) Written by 라미경 | 11-10 | 1888 스발바르조약 100주년, 그 함의 인기글
스발바르조약 100주년, 그 함의 배재대학교 교수 라미경 ​ ​ 1. 들어가기 2020년 올해는 스발바르조약이 체결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스발바르조약 ​1) 은 1920년 2월 9일 UN의 전신인 국제 연맹 참가국 14개국 ​2) (현재 46개국 가입, 대한민국은 201…
공지 제 47호(10-11월) Written by 빅재필 | 11-10 | 3122 통계로 본 군의 안전사고 유형과 범주 인기글
통계로 본 군의 안전사고 유형과 범주 충남대학교 국방연구소 교수연구원 박재필 ​ ​ 군은 부여된 역할과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 사고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각별한 지휘관심과 노력이 요구된다. 안전사고는 종류와 피해의 정도에 관계없이 군 장병의 사기저하는 물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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