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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8호(12-21.1월) | 이순신 장군과 국가방위(國家防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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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이세영 작성일21-01-07 17:44 조회1,8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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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과 국가방위(國家防衛)


건양대학교 군사학과

교수 이세영


I. 이순신 장군의 국가방위사상(國家防圍思想)


우리들은 흔히 이순신의 장군을 역사를 초월한 불멸의 리더​1)라고 부른다. 역사를 초월했다는 것은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 기록된 그 어떤 인물보다 뛰어나고 불멸이라는 것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충무공 이순신의 리더십이라는 저서를 쓴 김주영씨는 이순신 장군을 ‘나라를 위해 죽고자 했기에 죽지 않는 영웅이 된 인간’으로 표현하였다.​2)

. 군인으로서 이 정도의 삶의 흔적과 업적을 남겼다면 이순신 장군은 남들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 무과시험에 합격하고 큰 어려움 없이 인정을 받으면서 승승장구 했어야 맞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그 당시 나이로는 적은 나이가 아닌 32세에 그것도 두 번째로 도전 만에 합격하였다. 

그 당시 합격자는 29명이었는데 그중에서 12등을 차지하였으니 썩 좋은 결과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비록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합격 이후 시작된 군인 생활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에만 충실했을 뿐 높은 사람의 힘을 빌려 출세 가도를 달리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에 충실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이 그를 위로하자 그는 “사나이가 태어나서 충성으로써 죽음을 바칠 것이요, 쓰이지 않으면 들에 내려가 밭갈이하는 것도 족하다”라고 말하여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그는 54세에 노량해전에서 전사할 때까지 오직 나라와 백성만을 생각하며 평생을 살았다. 이러한 그를 ‘이순신의 리더십’이라는 책을 쓴 이선호 작가는 그는 애국효행(愛國孝行), 사회의리(社會義理), 선공숭문(先公崇文), 청빈근검(淸貧勤儉), 거경숭례(居敬崇禮), 지조신의(志操信義)​3) 등 6가지를 지녔던 인물이라고 평하였다. 이 중에서도 애국, 즉 나라가 없으면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삶 전체에 드러냈던 국가방위 사상은 급변하는 안보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II. 이순신 장군의 차별화 전략


1. 적의 약점을 최대 이용


 임진왜란 당시 왜군은 조선군보다 훨씬 우수한 개인화기를 가지고 있었다. 일찍이 반세기 전에 포르투칼로 부터 조총(鳥銃)​4) 이라는 신무기를 들여와 개인화기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무기로는 가장 우수한 무기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군은 칼, 창, 활로 맞서야 했으니 어려운 싸움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육지에 상륙하여 첫 전투였던 부산진성과 이어 벌어진 동래성 전투, 그리고 육지에서 벌어진 대부분의 전투에서 왜군에게 쉽게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다보니 왜군은 조선 수군들도 조총 사거리까지 접근하여 집중적인 사격을 가하고 백병전을 통해 쉽게 괴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을 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이러한 왜군의 의도를 간파하고 조총 사거리 밖에서도 왜선을 격파할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총통(銃筒)을 제작하였다. 총통을 만드는 데에는 많은 쇠가 필요했다. 이순신 장군은 쇠를 모으는데 승려들의 탁발을 생각해 냈다. 승려들을 화주(化主)라 부르고 쇠를 모아오게 한 것이다.​5)

 또한 왜군들이 가진 조총보다 우수한 조총을 만들기 위해 노획한 조총을 항상 눈앞에 두고 실험에 실험을 거듭하여 왜군보다 더 성능이 좋은 끝에 조선형 조총을 만들고 조정에도 보고까지 하였다. 이러한 총통을 사용하여 왜선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화포를 발사하여 왜선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거북선도 왜군의 취약점을 최대로 활용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왜군 함선의 약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들의 약점을 최대로 이용하기 위해 고민한 끝에 거북선이라는 돌격함을 개발하였다. 거북선을 이용하여 왜선 한 가운 데를 파고들어 화포를 쏘아대고 그대로 돌진하여 충격을 가하였다. 이에 왜군은 백병전을 펼쳐서라도 거북선의 위협을 막아내려하였으나 그 마저도 지붕에는 철침으로 덮여있어 접근조차 어려웠다. 한 마디로 왜군 입장에서는 상대할 수 없는 무적의 함선이었던 것이다.      

또한 일본은 바다를 통해 신속하게 남해와 서해를 통해 이동하여 육지로 진출한 군과 합류해야 만 하는 입장이다 보니 함선을 만들 때 속도 중심으로 만들었다. 즉  배 밑바닥이 뽀쪽하여 속도는 빠르나 급류에 취약하고 한 자리에서 바로 돌아 방향을 선회하기가 어려 웠다. 이러한 취약점을 알게 된 이순신 장군은 판옥선이라는 배 밑바닥을 넓찍하게 만들어 급류에도 강하고 제자리에서 배를 돌릴 수 있도록 반들었다. 이순신 장군는 남해 바다의 특성을 너무도 질 알고 있었으며 일본의 기도를 훤히 내다보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였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퇴(知彼知己 白戰不退)라는 말은 이순신 장군을 두고 말할 정도로 이순신 장군은 왜군의 약점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2. 지형의 잇점 최대 활용


이순신 장군이 지형의 잇점을 최대로 이용한 사례는 많다 그 중에서도 백미로 꼽히는 것은 명량을 선택한 것이다. 명량해협의 폭은 평균 500m이다. 그런데 명량해협은 해협 양안에 암초가 있어 배가 다닐 수 있는 너비는 평균 400m에 불과하였으며, 이 중에서도 이순신 장군이 주목한 지역은 울돌목지점이었다. 울돌목은 너비가 120m로 가장 좁은 곳이다. 이순신은 12척의 배로 이곳에서 적의 공격을 저지하기로 결정하였다. 왜선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장비와 병력을 가지고는 아무리 출중한 지략을 가진 이순신 장군이라 할지라도 승리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지형의 잇점을 최대로 활용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울돌목은 우리나라 바다에서도 가장 조류가 센 곳이다. 왜군들은 가능한 빠른 바닷길을 통해 한강으로 진출하려는 의도를 가졌기에 울돌목이 조류가 다른 지점보다 세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조선 수군의 열악한 장비와 병력 등을 볼 때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는지 200척의 왜선들이 2km에 걸쳐 길게 행렬을 이루어 빠른 속도로 접근하였다. 사실 이 당시 기록에 보면 이순신 장군을 제외하고는 무모한 전투라고 생각에 부하들이 쉽게 전투에 나서지 못했다. 전세로 볼 때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 12척대 200척의 싸움이니 말이다. 그러나 울돌목의 조류는 이순신 장군 편이었다.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전멸시킨 경험이 있었던 왜군들은 자신만만하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예측한 것처럼 좁은 물길 그것도 가장 조류가 센 곳에 다다르자 왜선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자신들의 의지대로 배를 다룰 수도 없었지만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선 수군이 일제히 공격을 퍼붓자 우왕좌왕하였다. 결국 왜군들은 결정적인 피해를 보고 뱃머리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이순신 장군은 단 한 척의 배도 잃지 않고 대승을 거뒀다. 이순신 장군의 23전 23승은 기적이 아니다. 비록 적보다 턱없이 부족한 전투력에도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지형의 잇점을 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지략의 결과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3. 해전의 중요성 인식   


  임진왜란에서 이순신이 왜적과의 첫 해전에서 승리한 것이 옥포해전이다. 더구나 국가최고통수권자인 선조 임금이 수도 한성을 버리고 서쪽으로 평안도 의주로 피난을 간 상태였으니, 그 승리가 주는 의미가 매우 컸다. 첫 출전에서 전사자 1명도 내지 않고 겨우 경상자 1명뿐인 피해에 비하여, 전과는 왜적선 13척 모두 깨트리고 불살랐다. 이것은 완벽한 승리이다. 이런 승리 과정에는 그동안에 이순신의 빈틈없는 계획과 조치들이 있었다. 그리고 적과 싸움에 있어 조선 수군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보다 목표의식의 명확성과 필살의 적개심에 있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초기의 패전 원인이 중앙조정에서 수군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한 정책, 전략의 부재에서 빚어졌다는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바다에서 왜적을 미리 막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왜적이 조선 땅에서 종횡무진으로 활보하고 그들에게 업신 당하고 있음을 간파하였다. 이순신은 그 뒤로 처음으로 출동하여 해전을 겪어보고 나서 그동안에 국가에서 취해온 정책을 비판하면서, 건의한 내용에 국토방위의 문제점이 육전위주로 전략을 펼친 것이 패배의 원인임​6)을 명확하게 판단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판단을 토대로 이순신 장군은 이기기 위한 전략을 구상하고 항재전장 의식 속에서 오직 싸울 준비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였다. 비록 조정에서 그의 생각에 대한 지지와 지원조차 제대로 없었지만 이에 포기하지 않고 나라를 살리는 길은 바다를 잘 막아내고 해전에서의 승리하는 길뿐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애국심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가장 큰 힘이 되었으며 바람 앞의 등불처럼 꺼져가는 조선을 구하는 영웅이 되었다. 만약 그 당시 이순신 장군이 그 자리에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4. 상황에 맞는 전법 구사  


  한산대첩에서는 유리한 위치에서 학익진(鶴翼陣)​7)이라는 전법을 구사하여 대승을 거둔다. 학익진 성공에 대한 전문가의 평가는 이순신이 오직 해전술의 전문가이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한산대첩에서 조선 수군은 101척을 쳐부수고 왜군 250급을 참획하였음에 비하여, 아군의 피해는 전사자 19명, 부상자 115명이었으며, 단 1척도 손실을 입지 않았다. 이처럼 이순신 장군의 해양사상은 현대적 군사사상 내지 전략사상을 갖고 있지 않으면 전혀 불가능한 것을 그가 실현했기 때문에 현대 전략 사상가를 능가할 정도로 훌륭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8)

   

  학익진 전법 이외에도 이순신 장군은 왜군의 공격 기도와 취약점, 그리고 지형의 잇점을 최대로 활용하여 다양한 전법을 구사하여 모든 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역사 속 주요 전쟁에서 많은 지휘관들이 적보다 우위의 군사력과 자신의 경험만을 믿고 전투를 했다가 패한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탄금대 전투에 나섰던 신립장군이 좋은 예이다. 조선군이 왜군에 비해 열세하다고 판단한 김여물은 신립장군에게 협곡을 이용하여 기습작전을 할 것을 조언하였다. 하지만 과거 승리한 경험만 믿었던 신립장군은 기병을 이용하여 무리한 공격을 감행하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언제나 신중하게 적을 파악하고 그들의 약점을 이용하여 전투에 임했기에 싸운 모든 전투에서 전승의 신화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III. 미래 지향적 국방력 건설


1. 승리할 수 있는 강한 군대 육성


손자는 손자병법에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사전에 일본의 침략 의도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이순신 장군의 분석처럼 철두철미하게 해상방어 능력과 육상전력을 함께 강화해 놓았더라면 전쟁 양상을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왜놈들은 20여 일 만에 한양도성을 무혈 입성하였다. 나라를 지켜야 할 선조는 초라한 모습으로 한양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 나라의 국군통수권자가 목숨을 걸고 싸워도 모자랄 텐데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역사는 냉엄하다. 국력이 약하면 언제든지 힘 있는 나라에 의해서 국가의 운명을 빼앗겼던 역사가 많이 있다. 만약 이 당시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2차 백의종군에서 풀려난 이순신 장군에게 남겨진 전투력은 12척의 배와 일부 수군에 불과하였다. 그 어떤 군사전문가라도 이 정도의 전력으로는 그 어떤 전투에서도 승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라 평가하였다. 그것도 조정으로부터 별다른 지원조차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지략으로 왜군과의 모든 해전에서 승리하는 놀라운 결과로 왜군이 물러나고 7년 전쟁이 끝나게 되었지만 그 당시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파도처럼 밀려오는 왜군의 침략을 끝내 막아내지 못한 채 조선의 운명도 일본 손에 넘어갔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들은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전쟁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만약을 위해서 국방력을 강화하는 노력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우리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국가와 잠재적으로 위협이 될 수 있는 모든 나라를 상정하여 항상 그들 국가보다 우위의 군사력을 갖춰야 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100년 동안 전쟁이 없더라도 싸울 수 있는 병력 유지와 훈련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말처럼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자세만이 어떠한 위협으로부터라도 국가를 수호할 수 있다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2. 3군 통합전력 발휘역량 강화


한반도는 3면이 바다이며 내륙으로 이어진 반도 국가이다. 따라서 5천 년 역사 속에 930여 회의 침략을 받아왔는데 침략은 바다와 육지를 가릴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늘도 방어해야 하는 상황이다. 결국 나라를 지키는데에는 육군과 해군, 공군이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북한과 마주하고 있는 안보 상황에서 지상군이 중요하다는 전문가들도 많이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군이 중요하다는 논리는 맞지 않는다. 국가안보에 있어 3군의 역할이 모두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중심군(中心軍), 핵심군(核心軍)이라는 단어보다는 통합군(統合軍)이라는 인식 속에서 각 군의 특성을 최대로 살리되 각 군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통합하려는 노력이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6.25전쟁 당시만 해도 주로 육상전투 위주로 전개되었지만 결국은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전세가 바뀌기 시작하였고 공군에 의한 대규모 지원과 폭격으로 반격의 여건이 조성되었다. 이는 3군의 합동성(合同性)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실히 증명해 주는 것이다. 미래는 더욱 3군의 합동성을 요구한다. 각 군이 가진 능력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융합하여 더욱 큰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느냐가 전승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 될 것이다. 


3. 대양해군으로의 발전


우리나라는 과거 수많은 민족적 수난을 겪으면서도 국가의 운명을 잘 지켜왔다. 특히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자마자 맞게 된 6.25전쟁은 남침을 위해 사전 철저한 준비를 해왔던 북한에게 3일 만에 남한의 심장이 서울을 점령당하고 모든 역량을 다하여 지키고 싸웠지만 40여 일 만에 낙동강선까지 밀려 갈 수밖에 없었다.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처지였다. 이때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전 세계의 많은 국가들이 유엔의 이름으로 어려움에 처한 우리나라를 도와주기 위해 머나먼 한반도로 속속 몰려왔다. 이러한 도움 덕분에 우리나라는 비록 많은 상처를 받았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을 지키게 된 것이다. 비록 전쟁으로 페허가 되어 다시는 극복이 어려울 것이라는 국내외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70여 년 만에 세계 속의 강국으로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따라서 어려울 때 우리를 도운 국가들에 대한 보답과 함께 세계 자유와 평화를 지켜나가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2011년 아덴만 여명작전의 성공은 우리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었다. 아덴만 여명작전은 대한민국 해군(청해부대)이 소말리아 해군에게 피랍된 대한민국 소속 선박 삼호 주얼리호를 소말리아 인근의 아덴만 해상에서 구출한 작전을 말한다. 청해부대는 소말리아 해역에서 활동 중인 해적들을 퇴치하기 파견된 대한민국 해군부대를 말한다. 이 부대는 단순히 우리나라 선박만을 보호하기 위한 부대가 아니라 국제연합의 대(對)해적 부대 요청에 따라 파견된 부대이다. 파견 이후 청해부대는 눈부신 활동으로 대한민국의 국위를 선양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저력을 전 세계에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안보는 이제 단순히 국토만을 지키는 것을 뛰어넘어 전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지켜나가야 한다. 더욱이 대부분 수출을 하여 국력을 키워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대양해군으로 발전하는 문제는 단순히 군사력을 강화하는 측면을 떠나서 세계를 향한 우리의 힘을 길러 나가는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4. 미래 우주군으로의 발전


전쟁의 영역은 이제 영토, 영해, 영공에서만이 아니라 우주까지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전쟁 양상의 변화를 예측하여 미국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들은 오래전부터 우주군을 창설하고 우주력 강화를 위한 다각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선진국들이 우주 공간까지 그들의 영향력을 뻗치려고 하는 것은 부족한 자원확보, 영토 확장, 국가 경쟁력 강화, 새로운 발전 동력 확보 등 여러 목적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목적은 국가 간의 경쟁에서 주도권을 갖기 위한 것이다. 아무리 우리들이 강한 육군과 해군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우주에서 내려다보며 위협한다면 이를 막아낼 방법이 없다. 따라서 우리 군도 요즘 들어 우주군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주력은 관심을 가진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강화되는 것이 아니다. 천문학적인 예산과 전문인력이 필요하고 선진기술을 확보하는 일도 필요하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사실상 공중에 대한 위협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공중을 잘 활용하였다. 오늘날처럼 발달 된 통신수단이 없었던 시대에 이순신 장군은 전투 중에서 상호연락 수단으로 각종 신호를 알리기 위해 연을 공중에 날리어 활용하였다. 비록 오늘날과 같은 항공기, 헬리콥터, 전투기는 아니지만 전승을 위해 최대한 하늘을 이용할 줄 아는 창의력을 발휘한 것이다.    


5. 글로벌 동맹전력 및 총력전 대비 예비전력 강화


한 국가의 국토를 방위하는데 있어 자주국방만큼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국제적 안보 상황은 자국의 힘만으로 국가안보를 지켜나가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따라서 글로벌 안보역량 확보 차원에서 동맹 간의 유대를 강화해 나가고 예상되는 다양한 안보위협에 대비한 훈련 등도 더욱 강화해 나가야 한다. 최근 전 세계가 코로나 19 상황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동맹 국가 간에 공조를 통해 피해확산을 최소화하고 조기에 상황을 종식시키려는 노력을 해 나가려는 노력이 더없이 중요하다. 앞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우리나라는 6.25 전쟁 당시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국란을 극복한 경험을 가지고 잇어 동맹전력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고 본다. 

또한 완벽한 국가방위를 위해서는 균형된 국가 전력을 갖추어야 한다. 국가의 전력(戰力)은 상비전력(常備戰力)과 예비전력(豫備戰力)으로 구분된다. 상비전력은 현재 군 복무 중인 현역과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와 장비, 그리고 현역장병들의 사기와 군인정신 등 무형전력을 말한다. 그러니까 상비전력은 적의 위협에 즉각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이라고 볼 수 있다. 예비전력은 현역을 제외한 예비군을 포함한 모든 국민들과 유사시 이들이 사용할 수 있는 무기와 장비, 그리고 국가안보의식과 전쟁 지원 의지 등을 말한다. 결국 국가를 방위하는 전력은 상비전력과 예비전력을 통합한 전력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이순신 장군은 조정으로부터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 수행을 위한 경제적 자립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둔전을 개간하여 백성과 군사를 먹였으며, 여기에 바다농사(물고기잡이, 해조류 채취, 소금 굽기 등), 공업생산력 확충(전선 건조, 무기 생산, 종이·의류·가죽 등 민수품 생산)​9)

 등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그리고 해전 시에 직·간접적으로 백성들과 승려 등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순신 장군의 백성 사랑과 나라사랑 정신에 감복한 사람들이 스스로 이순신 장군에게 많은 도움을 준 것이다.       


V. 결 론


 이순신 장군의 차별화 전략을 통해서 향후 우리나라의 국방력 건설의 방향을 몇 가지 제시해 보았다. 이순신 장군은 단순히 몇몇 전투에서 승리한 것으로 교훈을 남기신 분이 아니다. 대부분 남해를 중심으로 전개된 해전이었지만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성공적인 해전만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 밖에 없었던 최대의 위기 상황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이순신 장군이 치렀던 해전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전략적, 전술적 승리 요인을 분석해 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좀 더 큰 안목에서 국가방위사상 차원에서 접근하여 우리나라의 미래를 전망해보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싸워 이길 수 있는 국방력을 키워나가야 한다. 역사는 반드시 반복된다는 교훈을 잊지 말고 다시는 임진왜란 때처럼 외부의 위협에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순식간에 전 국토가 짓밟히고 6.25전쟁 당시 40여 일 만에 대부분의 국토를 북한에게 빼앗기는 아픈 역사가 되풀이 되서는 안된다. 이순신 장군은 늦은 나이에 군문에 들어선 이후 오직 국가와 백성만을 생각하며 나라를 지켰다. 54세의 나이에 그것도 전장터인 11월 차가운 바다에서 죽어 가시면서까지 나라와 부하들을 걱정했던 불멸의 이순신 장군은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다시는 그 어떤 나라도 우리나라를 얕보지 못하게 하고 유사시엔 싸우면 반드시 이길 수 있는 강한 국방력을 갖춰 나가라는 엄중한 경각심을 던져주고 있다.      

 


참 고 문 헌


김경수 편저, 평역 난중일기, 2005.

김주영, 충무공 이순신의 리더십, 2004.

김태훈, 그러나 이순신이 있었다, 2014.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2006.

박종평, 이순신 이기는 원칙, 2012.

이선호, 이순신의 리더십, 2006.

장한식, 이순신 수국 프로젝트, 2009. 

최두환, 충무공 이순신 그리고 미래의 꼬리아, 2009.

이순신역사연구회, 이순신과 임진왜란,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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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제 48호(12-21.1월) Written by 김종서 | 01-07 | 3083 군의 갈등관리와 조직 효과성 향상방안 인기글
군의 갈등관리와 조직 효과성 향상방안 -해군 초급간부와 병사들의 갈등관리를 중심으로- 충남대학교 국가안보융합학부 김종서 교수 Ⅰ 서 론 인간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갈등은 항상 발생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며 인간의 삶은 갈등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갈등은 가치관, 사고방식, 신념 등의 개…
공지 제 47호(10-11월) Written by 이승준 | 11-10 | 2045 영국의 역사가 한국에게 주는 시사점 (군의 역사를 중심으로) 인기글
영국의 역사가 한국에게 주는 시사점 -군의 역사를 중심으로- 충남대학교 국가안보융합학부 겸임교수 이승준 ​ ​ Ⅰ. 서 론 섬나라인 영국은 역사적으로 볼 때 바다를 통해 국가발전을 추구하여 왔다. 그 과정에서 왕실해군(Navy Royal)을 건설하고 이를…
공지 제 47호(10-11월) Written by 라미경 | 11-10 | 1888 스발바르조약 100주년, 그 함의 인기글
스발바르조약 100주년, 그 함의 배재대학교 교수 라미경 ​ ​ 1. 들어가기 2020년 올해는 스발바르조약이 체결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스발바르조약 ​1) 은 1920년 2월 9일 UN의 전신인 국제 연맹 참가국 14개국 ​2) (현재 46개국 가입, 대한민국은 201…
공지 제 47호(10-11월) Written by 빅재필 | 11-10 | 3122 통계로 본 군의 안전사고 유형과 범주 인기글
통계로 본 군의 안전사고 유형과 범주 충남대학교 국방연구소 교수연구원 박재필 ​ ​ 군은 부여된 역할과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 사고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각별한 지휘관심과 노력이 요구된다. 안전사고는 종류와 피해의 정도에 관계없이 군 장병의 사기저하는 물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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