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 해전에 관한 연구 > E-저널 2020년 ISSN 2465-809X(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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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저널 2020년 ISSN 2465-809X(Online)

제 42호(12-1월) | 청일전쟁 해전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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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조덕현 작성일20-01-14 15:02 조회1,432회 댓글0건

본문

 

청일전쟁 해전에 관한 연구

 

충남대학교

교수 조덕현

 

Ⅰ. 전쟁의 배경 : Cause 


  1894년에 발생한 청일전쟁Sino-Japanese War은 조선의 지배권을 둘러싼 청과 일본 간의 전쟁이었다. 강경한 쇄국정책을 추구했던 조선의 대원군이 1873년에 퇴진한 후 1875년 일본의 각본에 의해 운양호사건이 발생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하여 1876년에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적 행위와 개화정책에 대한 맹렬한 비판이 일어나 1882년에 임오군란을 계기로 대원군이 재집권하게 되었다. 임오군란의 소요로 인해 일본 공사관이 파괴됨에 따라 일본은 이를 구실로 삼아 조선에 출병하였다. 조선에 대해 종주국을 자처하던 청은 일본보다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하였다.

  1884년 12월 4일, 일본의 후원 아래 감행된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1885년 천진조약에 따라 청‧일 양국은 공동철수와 차후 파병할 때 사전에 통고하기로 하였다. 이후 1894년에 발생한 동학농민운동이 확산됨에 따라 조선정부는 청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6월 9일 청군 3,000명이 아산만에 상륙하였다. 청군이 출병하자 일본도 거류민 보호라는 명목으로 7,000명의 병력을 인천을 통해 상륙시켰다.

  동학농민운동이 평정되자 청은 일본에 대해 동시 철병을 제안하였다. 조선정부에서도 동시 철병을 지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이 기회에 청의 세력을 축출하려는 야심을 갖고 청의 제의를 거부하고 오히려 조선의 내정개혁을 추진하자고 제의하였다. 청은 그와 같은 제안이 외국에 대한 내정간섭이라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의도적으로 충돌을 야기시켜 정세를 자국에게 유리하게 전환시키려고 했던 일본은 회담이 결렬되자 7월 29일 성환의 청군을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성환전투를 계기로 하여 8월 1일에 청‧일 양국이 동시에 선전포고하였다. 청은 압록강을 거쳐 그리고 일본은 인천과 부산을 거쳐 각각 증원군을 파병하였다. 일본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청일전쟁은 일본군의 일방적인 공세로 진행되었다.





Ⅱ. 양측의 참가세력 및 작전계획


  청 해군은 서양식 해군으로 조직된 북양·남양·복건·광동 수사水師 : 이하 함대를 두었다. 이 4개 함대 가운데 북양함대北洋艦隊는 청 해군의 정예 함정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7,350톤급의 전한 정원定遠과 진원鎭遠을 비롯하여 경원經遠, 치원致遠 등 10척의 순양함이 있었다. 청일전쟁에 참가한 세력은 북양함대 전부와 후에 광동함대廣東艦隊에서 지원된 주력함 3척이었다.

  1881년에 독일에서 건조된 정원과 진원 두 거함은 청일전쟁 당시에는 다소 구식이 되었지만 주포로 12인치305mm 포를 각각 4문씩2연장 포탑 2기 탑재하였고 14.5노트의 속력을 가졌다. 이들은 포탑에 14인치, 현측에 12인치 장갑포대를 갖추어 명실공히 막강한 공격력과 방어력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1864년 4월 구 막부의 함선 4척으로 출발한 일본 해군은 점차 제후의 함선을 헌납 받아 대내적으로 군비 확충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일본 해군은 대만정벌1874과 러시아 및 청과의 관계 등으로 대외적 군비확장의 필요성에 따라 1875년에 군함 후소오扶雙, 공고金剛 및 히에이比叡 3척을 영국에 발주하였다.

  그런데 1891년에 청의 정원과 진원 두 거함을 중심으로 하는 청의 북양함대가 일본을 친선 방문하였는데, 이것은 사실상 일본에 대한 무력 시위였다. 여기에 충격을 받은 일본 국민은 일본도 강력한 함정을 보유해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이에 앞서 일본 정부는 1886년부터 「건함공채」를 발행하였는데, 많은 일본 국민들이 앞다투어 여기에 응모하였다. 일본은 이 공채를 이용하여 1889년에 4,200톤급 순양함 마츠시마松島와 이쯔쿠시마嚴島 2척을 프랑스에 발주하고 하시다테橋立 1척을 국내에서 건조하였으며, 이어서 3,700톤급 이게스시마秋津州를 국내에서 건조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은 삼경함三景艦 : 마쯔시마松島, 하시다테橋立, 이쯔쿠시마嚴島을 건조하여 주력함 확보에 노력하였고, 영국에 주문한 속사포 순양함 나니와浪速, 다까지호高千橞 및 찌요다千代田를 제1선에 배치하였다. 삼경함이 거포 320mm 1문씩 보유하였지만 위력이나 발사속도 면에서 청의 정원, 진원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본은 속사포를 갖춘 군함이 더 필요했지만 함정을 건조할 자금이 부족하였다.

  여러 차례 해군확장계획이 의회에서 부결 또는 삭감되자 명치 일왕을 비롯하여 많은 일본 국민들이 「건함기부금」 모금에 참여하였으며, 공무원은 봉급의 10%를 기부하였다. 이렇게 모금된 성금으로 일본은 전함 2척과 순양함 1척을 영국에 발주하였는데, 전함 후지富士와 야시마八島는 완성되지 않아 청일전쟁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순양함 요시노吉野는 참가하였다. 4,200톤급의 요시노는 당시 세계 최고 속력인 23노트를 자랑하며 속사포 6인치150mm 4문과 4.7인치 8문을 갖춘 최신예함이었다. 이리하여 일본은 20년 만에 구식 함대에서 64함대라는 신예 전투함대를 건설하였던 것이다.

  일본군의 작전계획은 대체로 2기로 나누어 제해권을 확보 여부에 따라 지상전을 수행하는 것으로 계획되었다. 먼저 제1기는 해전의 결과에 관계없이 제5사단을 한반도에 파견하여 청군을 이 방면에서 견제하고 국내에 있는 육‧해군으로 요지를 수비하면서 출정을 준비하는 한편, 함대를 출동시켜 청 해군을 격파하고 황해와 발해의 제해권을 확보하도록 노력하는 단계였다. 제2기는 해전의 결과에 따라 「갑작전甲作戰」은 제해권을 확보하였을 경우, 발해만에 육군 주력을 상륙시켜 야전에서 결전한다. 「을작전乙作戰」은 해전의 결과 결정적인 제해권발해의 제해권을 의미함을 확보하지 못했을 경우, 육군 주력을 한반도에 상륙시켜 이곳을 방비한다. 「병작전丙作戰」은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하였을 경우, 육군 주력을 일본에 주둔시켜 청군의 침공에 대비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청군의 작전계획은 일본 본토에 대한 침공 의도 없이 해군으로 발해와 근해를 제압하면서 육군부대의 해상수송을 호송하고 한반도에 주둔한 육군과 호응하는 한편, 육군은 병력을 평양에 집중시켜 일본군을 단계적으로 한반도에서 축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청군은 육군이 성환과 아산전투에서 패하고 해군이 풍도해전에서 패하자 새로운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새로운 작전계획은 완전히 수세적으로 바뀌었는데, 해군은 발해만을 제압하고 만주에 있는 육군의 대부분을 한만국경韓滿國境으로 이동시켜 봉천을 엄호하고 여순과 대련만의 육상정면과 해안방어를 강화하면서 각 성의 병력으로 북경을 엄호한다는 것이었다.



Ⅲ. 해전의 경과


가. 풍도해전豊島海戰


  청‧일 양국이 한반도에서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병력과 보급물자를 해상을 통해 수송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도 가능한 한 서울 또는 결정적인 전투지역에 인접한 항만으로 군대를 상륙시키는 것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청의 경우에 만주를 경유하여 한반도에 병력을 파병할 수 있었지만, 이것은 당시의 열악한 육로 교통의 조건에서는 매우 불리하다고 볼 수 있었다. 일본의 경우도 인천을 통해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 가장 신속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반도 서해의 제해권은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었다.

  1894년 6월 9일, 청군 3,000명이 아산에 상륙하였으며, 이들은 평양에서 남하하는 청군과 합세하여 일본군을 남북에서 협공하기 위해 성환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한편, 일본군 혼성여단이 6월 12일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에 진입한 다음, 성환의 청군을 공격하기 위해 남하하였다. 일본의 이또伊東祐享 연합함대 사령관은 한국의 서해 해상을 제압하고 7월 25일 이후에 전투를 개시해도 좋다는 지시를 받았다. 7월 25일, 제1유격대 사령관 쓰보이坪井航三 소장이 3척의 순양함 요시노, 나니와 및 아끼스시마를 지휘하여 풍도 근해 해상에 도착하였을 때, 청 해군의 제원濟遠과 광을廣乙 2척을 발견하였다. 양측은 07:25시부터 서로 포격전에 들어갔으나, 전투력에서 열세한 청군 함정 2척이 외해로 도주하였다.

  이때 청군의 다른 군함 1척과 상선 1척이 출현하였는데, 상선은 영국 상선기를 게양한 수송선 고승호高陞號였으며, 군함은 이를 호송하는 조강操江이었다. 아끼스시마가 접근하자 조강은 백기를 게양하고 전투 의사가 없다는 것을 밝혔다. 한편, 나니와가 고승호를 정지시키고 검색하였는데, 영국인 선장이 지휘하던 고승호는 약 1,100명의 청군을 아산만으로 수송하던 중이었다. 영국인 선장은 일본 군함의 명령에 따르겠다고 하였으나, 청군의 지휘관은 교전이 시작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본 군함의 명령에 불응하였다.

  나니와의 함장 도고東鄕平八郞 : 후일 러일전쟁 시 연합함대 사령관 대령은 심사숙고한 끝에 발포를 명령하여 고승호를 격침시키고, 영국인 선원을 모두 구조하였다. 고승호의 격침은 한때 일본 정부를 당황하게 하였으며, 국제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국제법상 정당한 행위로 평가되었다.


나. 압록강 해전Battle of Yalu River


  압록강 해전은 청일전쟁 기간 중에 양측의 주력함대가 공해상에서 전개한 유일한 해전이었다. 이 해전은 이또 제독이 지휘한 일본함대가 압록강 하구 외해에서 정여창丁汝昌 제독이 지휘한 청함대를 조우한 1894년 9월 17일에 발생하였다. 이때 청함대는 군대를 압록강 부근에 상륙시킨 수송선단을 호송하고 여순 항으로 귀항하던 중에 있었다.

  청함대는 7,350톤급의 전함주포 305mm 4문, 속력 14.5노트 정원定遠과 진원鎭遠 2척이 주력을 이루었다. 여기에 2,900톤급의 순양함210mm 2문, 15.5노트 래원來遠과 경원經遠 2척과 2,300톤급의 순양함210mm 3문, 18노트 정원靖遠과 치원致遠 2척이 있었다. 그 외에 1,000톤 내지 2,000톤급의 방호순양함 6척과 어뢰정 3척이 수행하였으며 총 12척이었으나 10척이 전투에 참가하였다. 일본함대는 4,300톤급의 장갑함320mm 1문, 16노트 마쓰시마, 이구스시마, 하시다테 3척을 비롯하여, 23노트의 속력을 자랑하는 4,200톤급의 속사포 순양함150mm 4문, 120mm 8문 요시노와 3,700톤급의 속사포 방호순양함260mm 2문, 18노트 나니와, 다까지호, 아끼스시마 3척이 있었다. 그리고 2,400톤급의 방호순양함120mm 10문, 19노트 지요다와 구식장갑함 후소오와 히에이 2척이 있었다. 그 외에 포함 아까기赤城 1척과 수송함 세이코마루 1척이 동행하였으나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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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록강 해전도


  전체적으로 청함대가 무장과 장갑 면에서 강력하였다. 모두 8문의 305mm 포를 갖춘 2척의 전함만으로도 우세를 확보하는 데 충분하였다. 이에 비하여 일본함대는 속력이 우세하고 속사포가 많다는 점에서 유리하였다. 정여창 제독은 예하 함정 10척을 쐐기진으로 전개하였는데, 전함 2척을 중앙에 위치하게 하고 좌우현에 각각 4척씩 나머지 함정을 배치하였다. 이는 동질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가운데 배치된 진형이었다.

  이또 제독은 예하 세력을 2개 전대로 편성하고 단종렬진을 형성하였다. 전위에는 차석 지휘관인 쓰보이 제독이 지휘하는 쾌속순양함 4척으로 구성된 유격전대가 배치되었으며, 후위에는 이또 제독이 직접 지휘하는 순양함 3척과 보다 저속인 장갑함 3척으로 구성된 주력전대가 배치되었다. 그리고 좌현 함미 쪽에 포함 1척과 무장 수송함 1척이 위치하였다.

  청함대는 6~7노트의 속력으로 전진하였으며, 일본함대를 정함수에 유지하기 위해 천천히 변침하였다. 이러한 기동은 충각과 두 전함의 305mm 주포 – 4문을 동시에 사격하려면 함수 방향만 가능하였다 – 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려는 의도였지만, 결과적으로 일본함대에게 T자를 씌우기를 허용하는 셈이 되었다. 양 함대가 접근하여 12:50시에 6,000미터 거리에서 청함대가 먼저 발포하였고, 12:55시에 3,000미터 거리에서 일본함대가 사격을 개시하여 치열한 포격전이 전개되었다. 쓰보이 전대는 청함대의 우익에 있는 순양함 2척에 포격을 집중하였다. 일본함대는 청함대를 시계 방향으로 포위하려고 하였다.

  일본함대는 청함대의 우익을 통과한 다음 쓰보이 전대가 좌회전하고 이또 본대가 우회전하여 청함대를 완전히 포위하는 상황이 되었다. 청함대의 진형은 우익에서 2척, 좌익에서 1척을 상실하면서 둘로 분리되었다. 15:30시경에 결국 와해된 청함대는 전투에서 이탈하기 위해 기동하였다. 청함대는 함정 3척을 상실한 외에도 함정 2척이 심한 손상을 받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청함대는 나머지 함정도 약간의 손상을 입었고 더욱이 탄약을 모두 소모하였다.

  진형을 재정비하고 선두에 위치한 이또는 전투를 재개하였으나, 이때 포탄 1발이 이또의 기함 마츠시마에 명중하였으며, 이로 인해 마츠시마는 진형을 이탈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또의 기함이 향도함으로써 행동할 수 없게 되자, 이또의 신호에도 불구하고 일본함대의 진형이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일본함대가 진형을 재정비한 후 17:30시경에 이또는 청함대의 나머지 함정에 대한 추격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청의 어뢰정이 출현하고 일몰이 되었기 때문에 이또는 추격을 단념하였다. 다음 날 이또는 위해위威海威에 이르는 항로상에서 청함대를 탐색하였으나, 청함대의 나머지 함정들은 여순항에 무사히 귀항하였다.

  이 해전의 결과 청함대는 4척經遠, 致遠, 揚威, 超勇이 침몰하고 1척廣甲이 좌초되었다. 12척 가운데 정원과 진원을 포함하여 7척이 여순항으로 귀항하였다. 일본함대는 3척마츠시마, 히에이 및 아까기만이 수리를 해야 할 정도의 손상을 입었을 뿐이다.


다. 위해위 봉쇄전


  제해권을 확보한 일본은 작전계획을 「갑작전甲作戰」으로 전환하고 제2군을 편성하여 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10월 24일, 요동반도에 상륙을 개시한 일본군 제2군이 대련과 여순 방면으로 진격하였으며, 제1군은 압록강을 건너 구련성九連城과 봉황성鳳凰城을 점령하였다. 11월 21일, 일본군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알려진 여순을 공격한 지 하루 만에 함락시켰는데, 이것은 10년 후 러일전쟁에서 요새를 경시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는 결과가 되었다.

  한편, 청의 북양함대는 압록강 해전에서 받은 타격으로 인해 여순 항에 대기하다가 10월 30일에 겨우 위해위에 입항하여 지상전에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은 청의 북양함대가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이 직예결전直隷決戰에 큰 장애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결전 이전에 북양함대를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위해위 군항을 육상으로부터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다음 해 1월 20일, 일본 해군 육전대가 위해위 부근의 양측 해안에 상륙하여 교두보를 확보한 후 육군부대가 상륙하였다. 2월 2일과 3일에 일본군이 위해위 시가지 외곽의 포대까지 모두 점령하였으나, 청군의 해안포대와 함정의 포가 「요새함대要塞艦隊」 전술로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일본함대는 항내의 청함대를 공격하기 위해 1월 30일 제1차로 어뢰정대를 출격시켰으나 악천후 때문에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2월 5일, 제2차로 어뢰정대 15척이 항내에 잠입하여 세계 해전사상에서 처음으로 야간 어뢰공격을 감행하였다. 이 공격에서 청의 기함인 정원이 항해 불가능 상태가 되었다. 2월 6일, 새벽에 일본 어뢰정대가 다시 출동하여 청해군 함정 3척을 격침시켰다. 2월 7일, 일본함대의 함포와 해안포대가 항내를 향해 포격을 개시하였다. 마침내 정여창 제독은 항복문서를 전달하고 자신은 음독자살하였다. 그리하여 청의 북양함대가 궤멸되었으며 일본 해군은 황해와 발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3월 9일, 청의 지상군마저 요양전투에서 패함에 따라 전쟁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이에 따라 4월 17일 양국은 강화조약인 하관조약을 체결하였다.



Ⅳ. 해전의 의의 및 승패요인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하관조약을 통해 요동반도, 팽호제도膨湖諸島와 대만을 획득하였으며 청은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아시아의 강국으로 부상하였으며 대륙침략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양 교전국이 공동의 전선을 갖지 않았고 주로 한반도와 만주에서 지상전을 수행했기 때문에 해양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해양력은 전쟁의 진행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압록강 해전은 장갑함의 강력한 방어력과 우세한 함포의 공격력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그러나 전함은 공격과 방어에 있어서 강력했지만, 순양함을 제압하는 데는 속력이 느렸다. 따라서 이 해전 이후 각국 함대는 전함, 고속장갑순양함 그리고 소형순양함 등 임무에 따라 분리하여 함대를 편성하거나 진형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압록강 해전은 종렬진이 화력 집중의 효과가 크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압록강 해전의 전술적 결과는 28년 전에 일어났던 리싸 해전Battle of Lissa, 1866년 7월 20일과 정반대의 상황으로 나타났다. 리싸 해전에서는 장갑과 포에서 우세한 이탈리아 함대가 종렬진으로 함포전을 시도하였으며, 반면에 장갑과 포에서 열세한 오스트리아 함대가 횡렬진을 형성하여 충각전술을 시도하였다. 리싸 해전의 결과는 이탈리아 함대사령관의 애매한 지휘로 인해 이탈리아 함대의 패배로 나타났으며, 이로 인해 증기선시대에 종렬진과 횡렬진의 우열 논쟁에서 충각전술에 유리한 횡렬진의 우위가 입증된 것처럼 나타났다. 그러나 압록강 해전에서 일본함대의 승리로 종렬진 대 횡렬진의 전술 논쟁은 종렬진의 승리로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청일전쟁의 승패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해전에 관련된 몇 가지 사항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청함대의 패인을 살펴보면, 첫째, 청군의 함대운용이 부적절하였다. 지휘부의 오판과 부적절한 작전 계획으로 인해 일본에 비하여 우세한 함대가 제해권 경쟁에 투입되지 않고 처음부터 수세적 태세를 취하여 육군부대 수송선단의 호송 또는 육군과의 호응작전이라는 소극적인 임무에 운용되었다. 더욱이 청함대는 활동 해역이 압록강에서 산동반도 돌출부를 잇는 선 서쪽으로 제한되었기 때문에 필요한 탐색 활동을 하지 못했고, 압록강 해전에서 패전하여 일본군의 요동반도 상륙과 산동반도 상륙을 허용하였다.

  둘째, 압록강 해전에서 청함대의 기동이 부적절하였다. 청함대가 자신보다 고속의 함정에 대하여 충각전술을 사용하기 위해 쐐기진을 형성한 것은 처음부터 전술적으로 무리였다. 다루기 힘든 쐐기진으로 기동의 제한을 받은 정여창 제독은 역기동을 전개하거나 청함대 화력의 이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또 활용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청함대는 시종일관 불리한 위치에서 혼란스러운 진형으로 전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으로 일본 해군의 관점에서 보면, 승리할 수밖에 없었던 몇 가지 요인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일본은 청함대와 대항하기 위해 국민적인 성원을 통해 함정을 건조하였다는 점이다. 일본은 함정을 건조하기 위한 공채와 모금에 국민이 적극 동참하여 주력함과 신예함을 확보하였다. 이는 청과의 전쟁에서 일본이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국민적 열망이 강하였다는 것이며, 싸우기 전에 이미 일본이 정신력과 함포 경쟁에서 승리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둘째, 일본함대는 자신의 무기체계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기동을 취하였다. 압록강 해전에서 일본함대는 고속의 이점과 현측 속사포의 장점을 활용하기 위해 지휘와 기동이 쉬운 단종렬진을 형성하고 전투를 수행하였다. 따라서 이또 사령관은 능숙하게 기동하고 자신의 의도대로 모든 화력을 적극적  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셋째, 일본함대는 속사포와 명중률에서 청함대를 압도하였다. 압록강 해전 시 양측의 함포를 비교해 보면, 12인치305mm 포 이상에서는 청함대가 8문, 일본함대가 3문 그리고 8인치 포 이상에서는 청함대가 21문, 일본함대가 11문을 보유하여 대구경포에 있어서는 청함대가 일본함대에 비해 2배 이상 강하였다. 그러나 일본함대가 신식 속사포 76문을 보유한 데 반해 청함대는 1문도 보유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일본 해군 함정의 피탄은 모두 140발, 청해군 함정의 피탄은 1,200발 이상이었다. 즉, 발사탄수와 명중률에 있어서 일본함대가 압도적으로 우세하였고, 속사포 유탄이 청해군 함정의 갑판에 화재를 일으키며 인면 피해를 주었다.



Ⅴ. 교훈


● 전투함대는 전쟁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운용되어야 한다. 근본적으로 제해권이란 적 영토에 대한 공격과 자국의 연안방어 그리고 적국의 해상교통로 공격과 자국의 해상교통로 방호에 사용됨으로써 전승을 보장한다. 일본함대는 적극적으로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또한 제해권을 확보한 후 이를 적극적으로 행사하였다. 반면에 정부의 간섭으로 소극적으로 운용된 청함대는 전쟁 수행 과정에 전혀 기여하지 못했다.


● 해전에서 화력은 기동성과 결합되어야 그 위력이 증대된다. 압록강 해전은 화력이 뒷받침된 기동이 결과적으로 화력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완만한 기동에 대해 승리하였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었다. 또한, 충각전술은 그것을 사용하려는 측이 적보다 저속인 경우에는 사용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시도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 전투지침은 명확하고 간명해야 된다. 압록강 해전 시에 청함대는 다음과 같은 3개 기본전술을 시달하였다. 「동형함은 동조기동하고 상호 지원하라. 항상 함수는 적을 향하도록 하라. 기함의 기동에 주의하라.」 이러한 기본 전술은 함대 전체를 하나의 전투 단위로 보았으며, 처음부터 질서정연한 함대기동을 기대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지침이었다. 반면에 전투 직전 일본의 선두함 요시노의 신호는 다음과 같았다. 「단종렬진을 준수하라. 적함이 속력 14노트, 3,000미터 거리에 접근하면 발포하라. 먼저 적의 우익을 격파하라.」 이 신호는 각 함정을 하나의 전투 단위로 간주하였으며, 각 함정의 행동에 대한 지침이 명확하고 간명했던 것이다.


● 유격전대flying division는 적절히 기동할 때 주력부대의 전과를 확대시킬 수 있다. 트라팔가르 해전 시 콜링우드 전대가 넬슨의 주력함대에 대해, 압록강 해전에서는 쓰보이 전대가 이또 주력함에 대해 그리고 대마 해전에서는 카미무라 전대가 도고의 주력함대에 대한 유격전대로서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들 유격전대는 적의 함대를 적절히 견제하거나 적의 진로를 방해하며 적으로 하여금 아군의 주력함대 쪽으로 기동하게 하여 전과를 확대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술적 효과는 진형 전투에서 성립되었던 것이며, 현대전에서 실효성 여부는 계속 연구되어야 한다.

 

<참고 문헌>


조덕현. 『세계사 속의 해전』. 서울: 신서원, 2006.조덕현. 『해전사 속의 해전』. 서울: 신서원, 2010.조덕현. 『전쟁사 속의 해전』. 서울: 신서원, 2016.

Paine, S.C., The Sino-Japanese War.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Keegan J., The Face of Battle. New York: Penguin Books, 1978.

          , A History of Warfare. New York: Vintage Books,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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